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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시... )26

변성기... 변성기/김수원 접시는 바꿔요 어제 같은 식탁은 맞지 않아요 초승달을 키우느라 뒷면이었죠 숨기고 싶은 오늘의 숲이 자라요 깊어지는 동굴이 있죠 전신거울 앞에서 말을 타요 알몸과 알몸이 서로에게 내 몸에서 나를 꺼내면 서로 모르는 사람 우리는 우리로부터 낯설어지기 위해 자라나요 엄마는 앞치마를 풀지 않죠 지난 앨범 속에서 웃어야 하나, 둘, 셋 셔터만 누르고 있죠 식탁을 벗어나요 눈 덮인 국경을 넘어 광장에서의 악수와 뒤집힌 스노우볼의 노래, 흔들리는 횡단열차와 끝없이 이어지는 눈사람 이야기, 말을 건너오는 눈빛들과 기울어지는 종탑과 나무에서 나무와 나무까지 밝아지는 모르는 색으로 달을 채워요 접시에 한가득 마트료시카는 처음 맛본 나의 목소리 달 아래, 내가 나를 낳고 나는 다시 나를 낳고 나를 낳고 내가 .. 2022. 4. 26.
발포진 랩소디* 발포진 랩소디*/서동석 하늘에도 물길이 있어요 비와 바람이 드나드는 길목이죠 낙엽도 허공에서 노를 저어요 겨울나무들은 흔들리지 않기 위해 허공 깊이 닻을 내리는 법을 알죠 좌현 쪽으로 기울던 오동나무 잎이 다급히 우현으로 몸을 틀어요 놀라지 마요 이곳에선 파도치고 배가 드나들 듯 흔한 일이죠 운이 좋으면 좌초된 해초 한 줄기에 당신의 오후가 생포될 수도 있어요 그럴 때는 그를 알아볼 순간이 필요해요 어쩌면 어선 위에서 젊은 어부가 되어 양식한 물김을 뜯고 있거나 또 모르지요 누각에서 홀로 일기를 쓰고 있을지요 해푸이 부는 밤바다에서 어떤 그림자를 보거든 신호를 보내듯 말을 걸어야 해요 이렇게 물어보는 건 어때요? 혹시 12라는 숫자를 좋아하세요? 아니면 푸른 버드나무 냄새가 훅, 스치거나 정강이 어디쯤을.. 2022. 4. 25.
유실수 유실수/차원선 너의 눈 안에는 열매를 맺으려 하는 나무가 있다 너의 눈에 나무를 심은 사람이 저기 소각장에 앉아 있다 자신의 옷을 다 태우고도 헐벗은 너를 보고 있다 멀뜽히 있는 너와 떨어진 잎을 한데 덮는다 앙상해지도로 베고 누웠다 잔향 더미로 만든 모래시계 마른 낙엽을 주워 구덩이로 몰아넣었다 왜 내 얘기를 듣고 있어요? 낯선 사람인가 봐 쓸쓸하다고 하면 데려갈 텐데 그대로 있어요 반딧불이 무리지어 올리는 온도 올라가는 건물 빈 곳은 비어있었던 적이 없고 마지막으로 옮긴 불씨 조각이 다 자란 나무의 잎에 옮겨붙는다 오랫도안 그를 알았다 열매를 남긴 나무, 앨범에 적히고 눈 안에 마른 씨앗을 품던 자리가 바스러져 날아간다 -2021년 한경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2022. 4. 25.
국수 국수/박은숙 허리가 굽은 노인이 식당 구석진 자리에 앉아 국수 한그릇을 시킨다 네명의 자리에 세명을 비워두는 식사 아마도 매 끼니를 빈자리들과의 합석이었을 것 같다. 잘 뭉쳐져야 여러 가닥으로 나뉠 수 있는 국수, 수백번의 겹이 한뭉치 속에 모이는 일, 뜨겁게 끓인 다음에 다 시 찬물에 식혀야 질겨지는 음식, 그 부피를 많이 불리는 음식은 힘이 없다지만, 그래서 여럿이 먹어도 한가지 소리를 내는 국수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는 저 노인의 슬하는 이남 삼녀의 망종(亡種) 꽃핀 곳 없는 행색이지만 한때는 다복했었을 것이다. 잇몸으로 끊어도 잘 끊어지는 빗줄기 같은 국수, 똬리를 튼 국수를 젓가락으로 쿡 찔러 풀어 헤친다 치아도 없는 노인이 먹는데 후루룩, 비 내리는 소리가 난다 비 오는 날 마루에서 들리던 .. 2022. 4.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