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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시... )26

해감... 해감/설현민 새벽 물때다 사촌들과 바지락을 캐러간다 이모를 도와야 했다 엄마, 엄마, 나 는 한 번도 이모를 본 적 없는데요 가족이잖니 단숨에 알아차릴 거다 모래사장은 구덩이로 가득하다 저 안에서 움직이는 게 보이니 저기 너희 이모가 있잖아 움직이는 게 너무 많 은걸요 네 이모처럼 움직이는 것은 하나뿐이란다 등을 돌려 앉은 엄마는 쇠갈쾡이로 발 밑을 푹푹 파올린다 나는 양동이를 끌어안고 움푹한 바닥을 들여다본다 모래 속에는 모래가 들어 있다 어린 사촌들은 껍데기를 손에 쥐고 땅을 헤집는다 또 다른 껍데기를 주워 자 랑한다 바지락을 얼마나 더 캐야 하나요 노인들의 배를 채우기에는 아직 모자라구나 이모는 왜 그렇게 깊이 파들어 가죠 깊은 곳엔 먹을 게 없잖아요 네가 그렇게 태어났지 모래를 툭툭 털고 너를 꺼.. 2022. 4. 23.
모천... 모천/김철 청계천 골목 어디쯤 모천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양양의 남대천이 아닌 뜨끈한 국수를 파는 국수 집 근처 어디라고 국수 발 같은 약도 적힌 메모를 들고 찾아간 미물도 명물로 만든다는 그 만물상 주물 틀에서 갓 나온 물고기 몇 마리 사왔지 수백 마리 수천 마리 붕어빵 구워낼 빵틀 파릇한 불꽃 위를 뒺ㅂ다 보면 세상의 모천을 찾아오는 물고기들 다 중불로 찍어낸 붕어빵 같지 한겨울 골목 경제지표가 되기도 하는 천원에 세 마리, 구수한 해류를 타고 이 골목 입구까지 헤엄쳐 왔을 따뜻한 물고기들 길목 어딘가에 차려놓으면 오고 가는 발길 멈칫거리는 여울이 되는 것이지 파닥파닥 바삭바삭 물고기 뛰는 모천의 목전쯤 되는 영하의 파라솔 아래 엄마가 하루 종일 서 있던 그곳 -2021년 16회 머니투데이 경제신춘.. 2022. 4. 23.
작명소가 없는 마을의 밤에... 작명소가 없는 마을의 밤에/신이인 오리너구리를 아십니까? 오리너구리, 한 번도 본 적 없는 고아에게 아무렇게나 이름을 짓듯 강의 동쪽을 강도이라 부르고 누에 치던 방을 잠실이라 부르는 것처럼 나를 위하여 내가 하는 일은 밖과 안을 기우는 것, 몸을 실낱으로 풀어, 헤어지려는 세계를 여어, 붙들고 있는 것 그러면 사람들은 나를 안팎이라 부르고 어떻게 이름이 안팎일 수 있냐며 웃었는데요 손아귀에 쥔 것은 그대로 보이는 대로 요괴는 그런 식으로 탄생하는 겁니다 부리가 있는데 날개가 없대 알을 낳지만 젖을 먹인대 반만 여자고 반은 남자래 강물 속에서도 밖에서도 쫓겨난 누군가 서울의 모든 불이 꺼질 때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알고 계셨나요? 기슭에 떠내려오는 나방 유충을 주워 먹는 게 꽤 맛있다는 거 잊을 수 없다.. 2022. 4. 23.
핑고... 핑고/황정현 극지의 순록은 우아한 뿔을 가졌다 거친 발굽으로 수만 년을 걸어왔다 죽은 자식을 동토에 던지며 발길을 돌려야 했고 비틀걸음으로 얼음산을 넘어야 했고 살점을 떼어 어린 자식의 배를 불려야 했고 뿔을 세워 침입자에 맞서야 했고 온몸을 쏟아 무리를 지켰다 죽어서도 흙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치열한 싸움에서 늘 이기고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당신은 무덤을 등에 지고 돌아왔다 무덤은 살고 당신은 죽었다 무덤 속에서 얼음이 자라고 있다 얼음은 흙을 밀어 올려 산이 될 것이다 얼음의 계절이 오면 순록은 바늘잎나무숲으로 순례를 한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당신의 길이 보인다. -2021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 2022.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