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재벌집 막내아들>/084화/나쁜 놈, 지독한 놈(1)/산경/필사/정 열

by 7sun 2023. 1. 27.

<재벌집 막내아들>/084화/나쁜 놈, 지독한 놈(1)/산경/필사/정 열 

 

"회계 감사는 안 됩니다. 오세현 대표 측 사람이 앉을 겁니다."

"곳간 열쇠는 쥐고 있겠다? 흐흐. 계산기만 두들기던 놈들이 곳간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나 보지?"

젠장, 불안하게 왜 이러시나?

"도준아."

"네."

"건설사 인간들 삥땅 치는 것 하나만큼은 예술의 경지에 이른 놈이다. 일용직 잡부 수백 명을 가라로 넣었다 뺐다 하는 것쯤은 눈감고도 해치운다. 오세현이 모르게 매일 천만 원 정도 빼먹는 건 일도 아닐껄?"

나를 놀리려 재미 삼아 하는 말씀이 아니다.

경고 아니면 충고인데... 뭘까?

"그뿐인 줄 아느냐? 수백, 수천만 원자리 원목을 몇 만 원짜리 나무로 슬쩍 바꿔치기하면? 오세현이나 그 직원이 원목 구분은 할 줄 알아? 철근 중량 빼먹기도 하고 심지어 함바집 반찬값도 빼돌린다. 넌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눈탱이 맞을걸?"

"살 떨리게 왜 이러세요?"

"아직도 모르겠느냐? 이 할애비의 뜻을?"

할아버지의 날카로운 눈빛을 받아내며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뜻을 찾아내야 실망을 안겨드리지 않는다.

"흙탕물에 몸을 담가야 진짜를 볼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대한민국 기업 비리의 온상이 바로 건설사다.

담합 비리, 조합장 비라, 공사비 뻥튀기, 하도급 비리 등등.

그 흐름을 전부 파악하라는 충고라고 결론지었다.

"건설사 임원들을 네 마음대로 쥐락펴락할 수 있다면 머슴 다루는 건 다 배웠다고 볼 수 있다. 그럼 그놈들이 알아서 네가 필요한 돈을 만들어 올 거다. 출처 불분명한 돈을 써야 할 때, 건설사만큼 든든한 곳도 없다."

절반만 맞췄다.

흙탕물을 몸에 묻히는 대신 비자금 창구를 확보하라는 뜻이다.

그래도 기특한 눈빛을 보내오니 다행이다 싶었다.

"내일 결산 열람한다고 했지?"

"네."

"순양건설 감사팀 보내주마. 함께 데리고 가거라. 오세현이 밑의 회계사 나부랭이들과는 비교도 안 될 거다. 영수증, 세금 계산서만 대충 훑어도 다 잡아낼 놈들이야."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벌떡 일어나 머리를 숙였다.

이 정도까 도와주시는데 대아건설을 통째로 삼키지 못한다면 나의 무능을 탓해야 한다.

"감사 인사는 나중에 해야 할걸?"

"네?"

"이 모든 게 전부 순양그룹을 위한 것일 수도 있다는 걸 알아야지. 할애비한테 뒤통수 맞고 징징대지나 말어. 흐흐."

아, 진짜. 끝까지 들었다 놨다 하는구만.

실실 웃는 할아버지를 보니 한숨만 나왔다.

* * *

"도준아, 이분들은 누구...?"

오세현은 나와 함께 온 시커먼 남자들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순양건설 회계 감사팀 직원분들입니다. 건설사 시멘트 품번까지 다 외우시는 분들입니다. 영수증 서너 장이면 돈 빼돌린 거 곧바로 추적 가능하니 내일 검찰에 제출할 자료는 충분히 확보할 수 있을 겁니다."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인지 오세현의 표정이 환해졌다.

"이거, 오늘 저녁엔 거하게 한잔 빨아야겠군요. 잘 부탁합니다."

"맡게 두십시오. 업무시간 끝나기 전, 껍질까지 홀라당 벗기겠습니다."

자신감 넘치는 감사팀 직원을 보니 든든했다.

서너 대의 승합차에 나눠타고 대아건설로 달려갈 때 마치 기습 공격하는 특수대원 같은 기분이 들어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

대아건설 빌딩 분을 열고 들어가면 오세현은 휴대전화를 꺼냈다.

"아이고, 강 전무님. 어떻게... 우리 주식 비싸게 살 고객은 찾으셨습니까?"

- 아, 오 대표님. 우리가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있으니 곧 좋은 소식 알려드릴 겁니다.

"이런, 제가 말씀을 잘못 드렸나요? 아니면 잘못 알아 들으셨나? 오늘 밤까지가 아니라 오늘 아침까지였는데... 그러니까... 댕! 이 소리는...? 우리 거래는 없었던 일이 됐다는 말이죠."

- 뭐, 뭐요? 당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 아니. 일단 만납시다. 만나서 다시 차분하게...

"그럽시다. 지금 대아건설 빌딩 로비니까 10분 안에 얼굴 보며 마저 이야기합시다."

오세현은 휴대전화를 든 채 내게 눈짓했고 나는 로비의 안내 데스크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대회의실이 몇 층입니까?"

"시, 십일 층입니다."

정장 차림의 남자 수십 명이 로비를 점령하니 안내 데스크의 여직원은 잔뜩 겁먹은 듯 더듬거렸다.

내가 11층이라고 수신호를 보내자 오세현은 휴대전화에 대고 말했다.

"지금 11층 대회의실로 갑니다. 거기서 얼굴 보죠."

휴대폰의 플립을 닫고 우리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11층에 멈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강무진 전무가 씩씩대며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오 대표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어떻게 하룻밤 동안 구매자를 구해요? 오늘 중으로 해결해 드린다니까요!"

"전무 자리에 앉으신 분이 아직 감이 안 오시나? 끝났습니다. 이제 주주의 권리부터 챙길 생각입니다."

오세현의 바로 곁에 서 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주식회사의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 제14조. 감사보고서 등의 비치.공시, 5항. 회사의 주주 또는 채권자는 영업시간 내에 언제든지 서류를 열람할 수 있으며, 회사가 정한 비용을 지급하고 그 서류의 교부를 청구할 수 있다."

건조한 음성이 끝나자 오세현이 싱긋 웃었다.

"들으셨죠? 작년, 재작년 결산 자료와 증빙서류 2년 치 전부 이 회의실로 가져오세요. 주주 입장에서 경영진의 능력에 의구심이 생겨서 말입니다. 도대체 회사를 어떻게 굴렸기에 이 지경이 됐는지 한번 봐야겠습니다."

강무진 전무는 자신을 외면한 채 회의실로 줄줄이 들어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만 있어야 했다.

"전무님, 이러고 있을 시간 있습니까? 주주가 요구하는 서류, 빨리 가져오세요. 여기서 일 더 크게 벌어지길 원치 않는다면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일침을 놓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 * *

"형님! 그놈들이..."

강무진 전무가 대아건설 사장실 문을 벌컥 열고 뛰어들어왔다.

"뭐야? 무슨 일이길래 이리 호들갑이냐?"

강무성 사장은 새파랗게 질린 동생을 보자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미라클에서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외부감사를 하겠다고 이미 대회의실을 점령했어요!"

"무슨 소리야, 그게! 어제 만나서 잘 해결했다고 하지 않았어?"

"주식을 되팔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돌아갔습니다. 이렇게 뒤통수 칠 줄이야..."

"도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강무성 사장은 동생에게 소리를 빽 지르고 재빨리 수화기를 들었다.

"송 대표. 난데... 뭐? 거기도 들이닥쳤다고? 이런 제기랄!"

강무성 사장은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회계사 사무실에도 몰려왔단다."

"네? 이 개새끼가..."

강무성 사장은 사장실을 서성대기 시작했다.

"이 자식이 왜 이러는 거야? 진짜 외부감사 해보겠다는 거야?"

"형님, 혹시 주식 가격 높이려는 수작 아닐까요?"

"뭐?"

"그렇지 않습니까? 어제의 그놈 눈빛, 표정. 아직 생생합니다. 쓸데없이 이런 일을 벌일 놈이 아닙니다. 분명 목적은 돈입니다. 증권맨 아닙니까?"

"이게 다 쇼다?"

"틀림없습니다. 외부감사로 그놈이 얻게 될 이익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어떡하자는 거야? 결론은 워야?"

강 사장이 소리를 꽥 질렀다.

분초를 다투며 살얼음판을 걷는데 프로나 다름없는 투자사 놈들이 회사를 샅샅이 뒤지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행여나 이 소식이 채권단으로 들어가면 그쪽에서도 감사하겠다고 덤빌지 모른다.

"제가 오세현이를 데려오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쇼부치고 돌려보내죠."

선뜻 내키지 않는 듯 강 사장이 망설이자 동생이 또 한 번 재촉했다.

"형님, 우물주물할 시간이 없습니다. 더 시끄러워지기 전에 끝내야 합니다."

"이 자식아! 네 입으로 별일 아니라고 말한 지 하루도 안 지났다. 이 자리에서 쇼부? 그러다 다 망치면?"

"그럼 이대로 놔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주주 권리를 내세우며 깽판 치기 전에..."

"됐다. 그만하고 빨리 데려와. 젠장, 온갖 거머리가 다 달라붙는구만."

* * *

"무슨 소리 하십니까? 대표이사님이 하실 말씀 있으면 여기로 오세요. 그리고 시간 끌지 말고 빨리 결산 자료 가져오시죠."

"오 대표님, 긴히 말씀드릴 게 있으니까 청하는 것 아닙니까? 너무 까다롭게 그러지 마시고..."

강 전무의 애처로운 표정을 보니 웃음이 날뻔했다.

오세현이 말한 것처럼 전무씩이나 돼서 저렇게 감을 못 잡아서야...

"전무님, 우리 미라클이 보유한 주식을 비싸게 매입하겠다는 걸 전하시려는 거 압니다만, 이미 늦었다고 우리 대표님이 말씀하셨죠? 헛수고 마시고 자료 가져오시죠. 10분 기다립니다."

새파랗게 젊은 내가 경고처럼 말하자 강 전무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했지만, 지금은 참아야 할 때라는 걸 안다.

아무 말 못 하고 오세현의 눈치만 계속 살필 때 다시 한 번 재촉했다.

"10분 내 우리가 요구한 자료를 이 회의실에 가져오지 않는다면, 다음 행동으로 들어갑니다. 지금 우리 변호사가 법원에서 대기 중입니다. 주주의 정당한 요구를 무시한다면 대아건설 경영진의 직무 정지 가처분 신청를 하기 위해 제 전화를 기다리는 중이죠."

역시 말보다는 법이 강하다.

변호사, 법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강 전무는 사색이 되었다.

이때 순양건설에서 합류한 감사팀 직원이 소리쳤다.

"니X미, 딱 보니까 견적 나오네. 구린 데X나게 많구만. 이봐요, 전무님. 우리도 뭔가를 손에 넣어야 쇼부 칠 거 아뇨? 반나절만 보면 우리가 보유한 주식의 적정 가격이 나올 것 같은데... 아닙니까?"

입에서는 험한 말이 나오지만, 표정은 웃는다. 심지어 찡긋하는 눈까지.

주식을 되파는 가격을 올리기 위한 요식행위일 뿐이라는 뜻이 숨어있다. 강 전무는 여전히 주저한다.

우리의 진의가 진짜 요식행위인지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거 참, 판단 느리네. 시끄럽게 분란 일으키면? 우리한테 득 될 게 뭐 있겠어요? 아직도 머리 안 돌아가? 안 되겠구만. 거 변호사한테 전화 때리쇼. 싹 뒤집어 버리자고!"

"오케이. 기다려요! 진즉 그리 말했으면 될걸..."

강 전무는 손을 슬쩍 들어 우리 입을 막고 재빨리 회의실을 떠났다.

여의도 사내들이 순양건설 사내들을 신기한 듯 바라보자 그들은 겸연쩍게 웃었다.

"저놈들이 썩었으면 우리도 적당히 때 묻은 척 하는 거죠. 이 바닥은 웬만한 건 다 뒷돈으로 무마할 수 있거든요."

"왜 이렇게 된 겁니까? 건설판이요?"

내가 궁금해서 묻자 그들은 머리를 슬쩍 긁었다.

"빠듯한 공기(工事期日) 때문이죠. 정해진 날짜까지 완공하는 게 지상 과제 아닙니까? 불법 따지고, 편법 따지고 할 겨를이 없는 거죠. 돈으로 메꿀 수 있으면 막아야 하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원리, 원칙 따질 겨를이 없는 겁니다. 그게 굳어져 관행이 되고 이 바닥 사람들 습성이 된 겁니다."

여의도 사내들도 고개를 끄덕인다.

한쪽은 오로지 숫자만 상대하던 사람, 한쪽은 거친 남자들을 상대하던 사람이다.

한자리에 모여 있으니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다.

묘한 조합을 보며 사람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때 강무진 전무가 회의실로 돌아왔다.

"자, 다 가져 왔습니다. 주주의 권리 실컷 누리시고 협상할 생각이 들면 언제든 사장실로 찾아오십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강 전무의 뒤를 따라 들어온 대아건설 직원들은 카트 하나씩을 밀고 들어왔고 그 카트 위에는 서류 박스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서류 더미에 파묻히게 하는 전략, 미드 법정물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기가 차서 한숨을 내쉬자 순양 직원이 씩 웃으며 말했다.

"아이고, 요즘도 이런 쌍팔년도 방법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