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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막내아들>/072화 4장, 쇼핑 카트(1)/산경/필사/정 열

by 7sun 2023. 1. 20.

<재벌집 막내아들>/072화 4장, 쇼핑 카트(1)/산경/필사/정 열

 

"협상은 이미 끝났습니다. 오늘 8일 자 환율 1,342원. 그걸 1,600원으로 해주셨는데 속셈이 있을 리 있겠어요?"

"이천 원이 넘을 수도 있어. 네 돈 십억 달러가 내 손에 들어올 때즘이면 넌 엄청난 손해를 보는 거야."

"환율이 정말 이천 원까지 오를까요?"

순양 경제연구소의 예측능력 한번 확인해야겠다. 정말 똑똑한 인재가 다 모였다는 소문이 맞을까?

"2,200원까지 오를 가능성 90% 이상. 이게 연구소 박사들의 예측이다. 늘 맞는 건 아니지만, 가끔 맞을 때도 있어."

할아버지는 내 눈치를 슬쩍 살폈다.

"왜? 이천 원까지 오른다고 생각하니 아깝냐?"

"저도 한번 말씀드린 적 있잖아요. 이천 원 넘을 거라고. 그렇지만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전 손자 아닙니까? 할아버지께 손해 본다는 생각할 만큼 쪼잔한 놈 아닙니다."

"쪼잔한 놈이 아닌 건 안다. 그렇다고 손해 볼 놈도 아니지. 뭐냐? 추가 조건이?"

눈치 빠른 사람에게 시치미 떼는 건 괜한 경계심만 불러일으킨다. 말 나온 김에 해치워야겠다.

"두 가지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그럼 그렇지. 좋다. 말해 보거라. 네놈이 손해 볼 걸 메꿔줄 만큼이 되는지 아니면 더 큰 이득을 챙겨갈지 한번 보자꾸나."

호기심을 드러내는 할아버지 앞에 준비해온 지도를 꺼냈다.

"이건 서울 지도 아니냐."

"네, 여기 붉은색 동그라미 친 곳을 한번 보십시오."

십여 군데의 위치를 꼼꼼히 살펴보던 할아버지는 고개를 들었다.

"여긴 뭐지?"

"서울시 소요 공유지입니다."

"공유지?"

"네, 전 이 땅을 싸게 매입하고 싶습니다."

"음... 서울시장에게 압력을 넣어 달라는 부탁이냐?"

"아닙니다. 이제 겨우 임기 6개월 남은 시장입니다. 차기 시장에게 부탁, 아니, 요구해야죠."

요구라는 말에 할아버지의 눈이 번뜩였다.

"너 혹시 고모부를 염두에 두었느냐?"

"그렇습니다."

"안 돼."

더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 지도를 밀쳤다.

'고모부 선거 자금은 제가 대겠습니다. 고모부가 서울시장이 되면 공유지를 매각하고, 할아버지께서는 이 공유지 지역구 국회의원에게 매각 압박만 해주시면 됩니다. 어쩌면 국회의원 압박은 필요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할아버지의 완강한 거부를 못 들은 척하며 할 말을 계속했다.

"글쎄, 안 된다고 하지 않느냐?"

"명분은 좋습니다. 국가 경제 위기 속에서 서울시도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비업무용 토지를 전부 매각한다면 반대 여론은 없을 겁니다."

"어허! 그놈 참!"

"반대하시는 이유,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놈은 진가가 아니라 최가다. 이 정도면 충분한 반대 이유 아니냐?"

역시, 핏줄은 남자의 피를 의미한다. 딸의 피는 가문의 영역에서 벗어난다.

나는 못 알아들은 척 엉뚱한 소리를 했다.

"서울시장은 순양그룹에 큰 여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최 서방이 정치하려는 건, 지 마누라 머리에서 나온 거다. 그놈은 마누라 꼭두각시에 불과해."

고모 진서윤은 딸이라는 핸디캡을 정치적 힘으로 커버하려는 속셈이다.

한국의 정치인 중 진 회장에게 맞서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지 않아도, 돋보기로 보지 않아도 순양그룹의 온갖 탈법, 편법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모두 눈을 감고 못 본 척한다. 누군가가 이 사실을 거론해도 곧바로 묻힌다.

만약 힘 있는 정치인이 스피커에 대고 떠들기 시작하면 곤란한 일이 자꾸 생길 건 불 보듯 뻔하다.

고모가 그 힘을 이용해서 딸이지만 아들만큼 순양의 지분을 요구하거나 더 이상을 받아내려 하는 것을 잘 안다.

"할아버지."

"그만하래두!"

"고모부를 순양그룹의 꼭두각시로 만들 생각은 왜 안 하십니까?"

"뭐?"

"서울시장 의자에 앉을 때까지 온갖 오물과 먼지가 묻을 겁니다. 그걸 쥐고 있으면 꼭두각시 아닙니까?"

"그 오물, 먼지는 순양에서 나오는 거다. 터트리면 순양도 다쳐."

"그 먼지, 오물 제가 뒤집어쓰겠습니다. 그래서 고모부 멱살을 꽉 틀어쥐고 있을 테니까 할아버지께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요놈 보게나. 돈은 내가 대는데 생색은 네가 내겠다고? 예끼! 이놈아."

할아버지는 어이가 없는지 콧방귀를 낀다.

"아닙니다. 돈도 제가 대겠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께서도 필요할 때 가끔 써먹으십시오."

"뭐라? 돈도 네가 대고? 그럼 그냥 밀어주거라, 내 허락이 필요 없지 않느냐?"

"할아버지께서 여당 대표에게 전화 한 통만 하시면 후보 지명도 못 받는데요? 아닙니까.

"딱 두 번, 8년만 서울시 청사 주인 행세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 기간 안에 필요한 거 챙기면 되지 않겠습니까?"

열심히 머리 굴리는 소리가 다 들린다. 이윽고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두 번째는 뭐냐?"

"허락하시는 겁니까?"

"아직 아니다. 두 번째부터 말해."

"대아건설로 정부지원금이 흘러 들어가는 것을 막아주십시오."

"뭐시라? 대아건설?"

생뚱맞게 튀어나온 이름 때문에 할아버지의 눈이 커졌다.

"공유지 받아 주차장 할 생각 없습니다. 그 땅 위에 뭔가 올려야죠. 그러려면 작은 건설회사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작은? 대아라면 도급순위 5위다. 그게 구멍가겐 줄 아느냐?"

"할아버지 저 아진그룹과 순양자동차의 주인입니다. 거기 비한면 대아는 구멍가게죠."

갑자기 할아버지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허락인가?

"네 이 녀석, 진심이구나."

"네?"

"너 스스로 회사를 일군다고 떠든 거 말이다. 순양건설 뚝 떼어 달라고 떼쓰는 소리가 아니라 대아를 인수할 생각이라니..."

"혹시 떼쓰면 주실 생각이셨어요?"

농담처럼 웃으며 말하자 할아버지는 또 묘한 표정으로 변했다.

"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뭐, 어차피 무의미하게 됐다. 넌 대아를 인수하겠다고 했으니 말이다."

아니다. 속지 말자. 저건 날 약 올리려 하는 말이다.

속으로 몇 번이나 되풀이했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대아건설이라..."

"네, 지금의 이 외환 위기를 벗어날 기업은 없습니다. 분명 대아건설도 달러에 목마를 텐데 정부지원금만 끊으면 부도납니다. 그때 제가 주워 담겠습니다."

"대아, 좋은 기업이지. 수혈 몇 봉지만 해주면 멀쩡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오세현 대표와 직원들이 며칠 동안 파고들어 엄선한 회사니까요."

"그러니까 대아와 최 서방의 서울시장은 한 묶음이구나."

"네, 제가 피를 공급하고 고모부가 거름이 되면 활짝 필 겁니다."

"최 서방의 선거와 순양의 연결고리는 전혀 없으니 문제도 없고?"

"그렇습니다."

할아버지는 깊은 생각에 잠길 때 나오는 버릇,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나도 입을 다문 채 조용히 기다렸다.

"그렇게 대아건설을 활짝 꽃피운 다음..."

"당연히 순양의 이름을 달겠습니다."

"그거 참으로 듣기 좋은 말이구나. 순양 계열사 늘이는 건 이 집안에서 나 말고는 너뿐이다. 허허."

느낌이 좋지 않다. 저 웃음, 기분 좋은 웃음이 아니다.

"둘 다 생각 좀 해보마. 아무튼, 우리 계약은 끝난 거 맞지?"

"네."

"그럼 돌아가서 서둘러. 그룹 사장들까지 동요한다. 10억 달러가 빨리 들어와야 좀 진정할 게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더 보채지 않고 물러났다. 혹시 모르니 고모를 만나 단단히 일러둬야겠다.

* * *

진 회장은 서재를 나가는 손자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참았던 충격을 가라앉히고 싶어 서재를 서성거렸다.

나라의 경제위기 극복에 협조하는 서울시장이, 재원 마련 방편으로 공유지를 매각한다는 명분이 좋다.

그 시장을 제 손으로 만들고 땅을 차지한 후, 그 땅을 돈뭉치로 만들 수단인 건설사를 인수한다.

그림이 너무 좋다.

이 좋은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환율 폭들이 뻔하데도 몇천억쯤 포기하는 배포도 있다.

몇천억 이상의 돈을 뽑아낼 자신이 있다는 소리 아닌가?

손자의 설명을 듣는 순간 즉석에서 승낙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눌렀다. 쉽게 힘을 빌려줄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리고 또 한 번 무서움을 느꼈다.

저놈은 귀엽고 잘생긴 얼굴 아래, 가장 포악한 맹수의 기질을 숨긴 놈이다.

아진그룹에, 대아건설에, 순양의 이름을 달겠다는 달콤한 말, 속으면 안 된다.

순양자동차를, 순양건설을 뺏어갈 놈이 확실하다.

자신의 것을 얻어가려는 자식놈들보다 뺏어가려는 손자가 훨씬 기특하고 사랑스럽다.

하지만 두렵고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 * *

"뭐? 말했다고?"

"네."

"도준아! 내가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니? 아빠가 아시면 산통 다 깨지는 거야. 절대 허락할 리 없어. 큰일 났네. 이젠 우리 다 죽었어."

고모는 정말 죽을 얼굴로 호들갑을 떨었고 고모부는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고모, 좀 진정하세요. 괜찮다니까요."

"뭐가 괜찮아!"

"여보, 좀 진정하고 도준이 말 들어봅시다. 생각이 있으니까 말했겠지. 안 그래?"

마누라 장단에 놀아나는 놈이니 생각이 모자란다. 서울시장 될 생각에 기대 가득한 표정만 짓고 있다.

"할아버지께서 생각해 보신다고 했어요. 무조건 반대하시는 게 아니에요."

고모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솔직히 두 분 다 할아버지가 반대하시는 이유는 아시죠?"

"왜? 네게 무슨 말씀 하시디?"

"고모부 선거 자금이 순양에서 흘러 들어가는 게 찝찝하신가 봐요. 정치 스캔들이 터지면 큰 문제가 되니까요."

고모는 내게서 뭔가를 캐내려는 듯 내 표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살피기 시작했다.

"그래서 말씀드렸죠. 선거 자금은 다른 곳에서 구하면 되니까 모른 척만 하시라고요."

"또? 다른 말씀은 없으셨어?"

"그래도 정치에 몸담으셨는데 서울시장 정도는 하시고 정계에서 은퇴하면 보기 좋지 않겠냐는 말씀만 드렸어요."

"뭐? 시장으로 끝내? 말도 안 되는 소리!"

멍청한 새끼. 말귀를 못 알아들어!

"여보! 눈앞의 산부터 넘는 게 더 중요해. 가만 좀 있어봐!"

고모의 눈치가 훨씬 낫다.

"도준아, 만약 아버지가 허락하시고 모른척해 주시면? 선거 자금은 가능해?"

"얼마나 들어요?"

나는 순진한 척 눈을 깜빡거렸다.

"특별당비 30억 내고 당 중진들에게 50억쯤 뿌리고... 선거운동 자금으로 삼백억 정도 써야 해. 넉넉합고 사백억?"

고모부는 기다렸다는 듯 숫자를 줄줄 읊었다.

사백억이 뉘 집 강아지 이름도 아니고... 정말 현실 감각 없는 놈이다.

적어도 상세한 내역은 이미 뽑아놓고 기다려야 하지 않는가?

 

"우와! 엄청나네요."

눈을 크게 뜨고 소스라치게 놀란 척하니 고모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왜 놀래? 그 정도 없어?"

"많이 부족하죠. 그리고 아버지 극장 지을 돈도 빼놔야 하고요."

잠자코 있던 고모가 입을 열었다.

"내가 150억 정도는 준비할 수 있어. 넌 250억만 마련하면 돼. 가능해?"

"네, 그 정도는 가능해요."

두 사람의 표정은 그냥 보기 민망할 정도로 우습다.

놀라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는 어린애 같은 얼굴이다.

"내가 한 번에 150억을 뺄 수는 없어. 일단 내년 초에 특별당비를 납부해야 하니까... 30억부터 준비 좀 해줘."

이것이 현실감각 없는 재벌집 사람들의 뇌 구조인가?

겨우 스무 살자리 조카에게 수십억, 수백억을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정말 이들에게 돈의 단위는 억부터 시작하는 건가?

"네, 빨리 준비할게. 참, 그전에 계약서부터 써야죠?":

"뭐? 계약서? 무슨 계약서?"

두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 눈만 쳐다본다.

"영수증도 못 받는 돈인데 계약서라도 있어야죠. 안 그래요?"

나도 덩달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마주 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