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재벌집 막내아들>/067화 4장, 발톱의 길이(2)/산경/필사/정 열

by 7sun 2023. 1. 18.

<재벌집 막내아들>/067화 4장, 발톱의 길이(2)/산경/필사/정 열

 

진동기는 차가 멈추자 창밖의 높은 빌등을 올려다봤다.

"여기 맞아?"

"네, 사장님."

"이 자식, 돈 좀 벌었나 보네."

"제작뿐만 아니라 곧 배급까지 한답니다. 충무로 파워맨이죠."

보조석에 앉은 비서가 설명을 늘어놓자 진동기는 손을 내저었다.

"됐다. 그래 봤자 몇 푼이나 번다고? 어차피 취미생활인데."

비서는 차에서 내린 진동기의 뒤를 따르려 했지만 멈춰야 했다.

"대기해. 혼자 간다."

영화사 문을 열고 들어가니 수십 명의 사람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부터 보였다.

입구에 안내 데스크가 없는 회사는 처음이라 당황했고, 잠시 사무실 입구에서 멍하니 서 있어야 했다.

"어떻게 오셨어요?"

"네?"

"어디서 오셨는지...?"

"아, 사장님 좀 만나러 왔소."

바삐 움직이던 직원 한 명이 어색하게 서 있는 진동기에게 조금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러니까 어디 회사에서 오셨냐고요?"

"진윤기 사장, 형이오. 친형."

"아, 네. 따라오시죠."

"허허, 거참."

진동기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젊은 직원의 뒤를 따랐다.

사장의 친형이라고 분명히 말했는데도 딱히 공손하지가 않다. 게다가 사장실이 아닌 조그만 회의실 같은 곳에 안내하자 속이 끓어 올랐다.

"이봐. 여긴 뭐야? 사장 만나러 왔다고 했잖아. 내가 형이라고!"

"사장님은 지금 회의 중이시라서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메모 넣겠습니다."

젊은 직원은 진동기가 더 말할 새도 없이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이런 대접은 처음이라 속이 부글부글했지만 그것도 잠시, 조금 지나니 묘한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를 제외하고 누구를 기다린 적이 없었다. 항상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왔고 그들을 기다리게 했다.

그들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알 것 같을 때, 벌컥 문이 열렸다.

"형님. 이거... 어쩐 일이세요? 여기까지 다 오고."

"이 자식이, 내가 못 올 데를 왔냐? 뭘 그리 놀래?"

진동기는 미소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하이고, 근 10년 동안 한 번도 안 오셨으니 하는 말이지."

내민 손을 잡는 진윤기의 말에 진동기는 깜짝 놀랐다.

"뭐? 벌써 그렇게 됐어? 10년이나?"

"뭐, 됐고. 제 방으로 가요."

사장실에 들어서자 진동기는 미간을 찌푸렸다.

"돈 많이 벌었다면서 이 꼴이 뭐냐?"

순양그룹의 말단 이사보다 작은 방. 집무용 탁자도 평사원과 비슷하다. 가뜩이나 작은 바에 온갖 서류가 너저분하게 쌓여 있으니 흡사 창고 같은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다 헛소문이야. 이 바닥에서 돈 많이 벌어봤자 형님 회사 부서 하나만도 못해."

"야! 내가 도저히 못 참겠다. 내일 사람 보낼 테니까 사장실 넓혀봐. 좀 그럴듯하게 꾸미고 살아."

진윤기는 짜증 섞인 형의 말이 호의라는 걸 안다.

"형님, 좀 잘나가는 영화사는 사장실 좋아요. 회사 인테리어도 삐까번쩍하고."

"그런데 넌 왜 궁상이냐?"

"빚 갚아야지."

"뭐" 빚?"

 

진동기가 소스라치게 놀라자 진윤기는 손을 내저었다.

"사채 땡겨 쓴 거 아니니까 놀라지 말고. 이 일 시작할 때, 자본금 도준이가 준거잖아. 목장 팔아서... 몰랐어?"

"아, 그렇지. 기억나네."

"그건 갚아야지. 아버지가 어린애 코 묻은 돈 빼먹었는데 다시 채워줘야 하지 않겠어?"

"듣고 보니 그러네. 말아벅은 것도 아니고 잘 벌면 갚아야지. 이자 듬뿍 얹어서. 하하."

"자자, 그런 이야기 그람하고. 용건 꺼내 놓으세요. 뭔 바람이 분 거야?"

진윤기가 담배를 내밀자 진동기는 하나를 빼 물었다.

몇 모금 연기를 들이마시고 길게 내뿜으며 입을 열었다.

"넌 이 길 계속 갈 거지?"

"응? 뭔 뜻이유?"

"영화판에서 끝장 볼 거냐고 묻는 거다."

이번에는 진윤기가 한동안 담배를 연기만 내뿜었다.

"회사 쪽은 쳐다보지도 마라?"

"그래. 너도... 네 자식도..."

진동기의 말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진윤기는 다시 담배만 피워댔다. 그 모습에 진동기의 인상도 구겨졌다.

"설마 너도 욕심을 숨겼던 거냐?"

"너도? 그럼 욕심을 숨긴 사람이 또 있습니까?"

"너 빼고 전부 아니겠어?"

"그런가? 제 눈에는 모두 욕심을 질질 흘리고 다니던데요?"

"말 돌리지 말고. 욕심, 있었던 게냐?"

진동기의 재촉에 진윤기는 담배를 비벼끄며 말했다.

"지금까지 애비 노릇 못했는데 한 번은 할 생각이거든."

"도준이를 말하는 거냐?"

"그놈이 할아버지 같은 기업가가 꿈이랍니다. 아, 오해는 사절."

진윤기는 형이 뭔가 말하려는 걸 손을 들어 막으며 말을 이었다.

"순양그룹 계열사 몇 개 먹겠다고 설칠 만큼 작은 그릇 아니야. 제 손으로 뭔가 이루고 싶어 해. 난 최선을 다해 도울 거야."

"그게 회사랑 무슨 관계지?"

"비록 겉도는 막내아들이지만, 나도 순양그룹 회장님 핏줄이야. 주는 걸 사양하지 않을 거고, 안 준다면 내 몫은 내가 챙겨야지. 부족하지 않을 만큼."

"부족하지 않은 네 몫이라..."

막냇동생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본 진동기는 놀란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갑자기 이러는 걸 보니 큰형님과 뭔 일이 있었겠네. 뭡니까?"

다시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보이는 진윤기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순양자동차 때문에 지분 변동이 심한가 봐요?"

"그런 거 아니다."

진동기는 의자를 뒤로 밀려 일어섰다.

"넌 지금처럼 빠져 있어. 그리고 날 응원해라. 내가 이기면 부족하지 않을 만큼, 도준이 꿈을 이를 밑천은 내가 준비하마."

"큰형이 이기면?"

"애비 노릇 하려면 큰형이랑 싸워야 할 게다."

사장실을 나가려던 진동기는 몸을 돌려 마지막 경고의 말을 던졌다.

"큰 욕심은 부리지 마라. 하나뿐인 남동생, 잃고 싶지 않다."

"뭔 소리야? 셋째 형도 있는데."

"상기 그놈은 내 동생 아닌 지 오래됐다. 그놈은 큰형 동생일 뿐이야. 명심해. 너라도 내 동생으로 남아라."

진동기의 씁쓸한 표정이 진윤기의 마음 한구석에 조용히 자리 잡았다.

"근데 이건 무슨 영화야? Titanic?"

진동기는 사장실 출입문에 걸린 포스터를 가리켰다.

"아, 그거 우리 회사가 내년 초에 배급할 거야. 지금 극장 잡고 있어."

"표 안 팔리면 말해. 왕창 사줄 테니까."

"말이라도 고맙수. 흐흐."

* * *

"누나? 매형? 어쩐 일이야? 이 시간에?"

진윤기는 밤 9시가 넘어서 갑자기 방문한 두 사람을 보며 오늘 낮, 집안에 대단한 일이 있었는데 놓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낮에는 형, 밤에는 누나라니!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꽉 찬 일정표로 움직이는 인간들이다.

또, 뜻밖의 방문이 자연스러울 만큼 왕래가 잦은 가족도 아니다.

특히 백화점 사장, 정치인인 두 사람은 뚜렷한 목적 없이 동생 집을 늦은 시간에 오지 않는다.'

"뭐 그리 사무적이야? 동생 집에 올 수도 있지."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미안. 일단 앉아. 매형도요. 차라도 한잔 드릴까요? 아니면 술?"

"아니, 물이나 한 잔 줘."

지친 모습의 매형은 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올케는 안 보이네? 어디 갔어?"

"미국 간 지 좀 됐어. 상준이 지내는 거 돌봐준다고."

일하는 아주머니가 물잔을 내려놓자 진서윤이 웃으며 말했다.

"됐으니까 들어가 쉬어요. 중요한 이야기라..."

아주머니가 물러나자 진윤기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이 뭔 날이긴 한가 봐. 다들 표정이 안 좋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다들이라니?"

"아, 아냐. 회사일 때문에. 그래, 무슨 일이야? 두 분이 나란히 오신 걸 보면 물 한 잔 마시는 게 볼일은 아닌 것 같고."

진서윤은 동생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돈 좀 융통해줄 수 있어?"

"뭐? 돈?"

어처구니가 없었다. 백화점 사장이 고작 영화사 사장에게 돈을 빌려달라니?

백화점 하루 매출이면 영화 한 편의 수익 아닌가?

진윤기의 표정에서 그의 속내를 읽은 진서윤이 황급히 말했다.

"아버지가 한도제철 인수할 때 캐시 싹 긁어가셨고 지금은 백화점 돈을 다 묶어 버렸어. 입출금 내역 매일 보고 중이야.

"왜? 누나 사고 쳤어?"

"아냐! 이이 때문에 그래."

진서윤은 곁에 앉아 한숨만 내쉬는 남편을 흘겼다.

"내년 서울시장에 도전하겠다고 하니까 자금줄을 막아버리신 거야. 백화점 돈, 손도 못 대."

"서울시장?"

돈 빌려 달라는 말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소리다.

"너 올해 접속인가 접촉인가 그거 대박 쳤다면서? 돈 좀 만졌을 거 아냐?"

"한국 영화 대박 친다고 해서 몇 푼이나 번다고? 입장료 얼만지 알아? 육천 원이야, 육천 원. 관객 67만이야. 대해도 40억이 전부라고. 극장이 떼가고, 배급사 떼가고, 제작비 떼고... 얼마 남았을 것 같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이렇게 세상 물정 모르다니!

황금 덩이 위의 세계에서만 지내니 현실을 모른다.

흥행 수익을 듣자 두 사람은 또 한 번 한숨을 쉬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처남, 못 들은 거로 해줘."

현관문을 나서는 두 사람을 보며 진윤기는 혀를 차며 이 층으로 올라갔다.

대문을 나선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눈짓했다.

진서윤이 휴대전화를 꺼냈을 때 택시 한 대가 들어왔다.

"어? 고모?"

부부는 돈 많은 조카의 얼굴을 보며 활짝 웃었다.

"네? 서울시장?"

"왜? 너 이고모부 무시하냐?"

무시할 말한데 티 낼 수는 없는 일, 호텔 로비 라운지가 환하도록 웃어줬다.

갑자기 나타나 내 팔을 끌고 차 한잔 마시자더니 결국 돈 이야기인가?

"그럴 리가요, 의외라서 그런 거죠."

"어차피 여당이 이겨. 당의 후보만 되면 게임 끝이야."

과연 그럴까?

정권이 바뀌면 여당 야당이 뒤바뀐다.

역량보다 욕심이 앞서니 자꾸 가망성 없는 일에 매달린다.

"할아버지께 말씀 드리..."

할아버지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두 사람의 입에서 약속이나 한 듯 한숨이 나왔다.

"야단만 맞으셨군요."

고모가 머리를 끄덕였다.

"음..."

백화점 돈은 꽁꽁 묶였을 테니 네게 쪼르르 달려온 건가?

내년 대통령은 DJ가 분명한데 서울시장이 누구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혹시 선거 자금 때문에요?"

돈이라고 하니 두 사람의 눈이 반짝인다.

"그래. 당 대표와 중진들에게 돌릴 돈만 있으면 돼. 당후보로 낙점만 받으며..."

"할아버지 전화 한 통이면 절대 그럴 일 없을 텐데요?"

"그건 내가 막을 거야. 내가 알아서 할게."

고모는 자신 있다는 듯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런데 얼마나 들어요? 저, 그렇게 많은 돈은 없어요."

처음부터 거절하는 건 하수라 했던가?

아직 반년 넘게 시간이 남았다. 갈고리를 꿴 채 끌고 다니며 필요할 때 빼버리면 된다.

"얼마나 가지고 있어?"

고모부의 반짝이는 눈.

"글쎄요. 투자처에 묶인 돈이라 확인해야 해요. 잘 아시잖아요. 주식, 채권 시세는 매일 바뀌는 거. 그리고 선거전까지 묶인 돈을 현금화할 수 있는지도 확인해야 하고요."

다소 실망한 고모부의 눈. 하지만 기대를 버리지 않은 눈빛이다.

"그럼 확인 좀 해봐. 나도 필요 자금 뽑아볼게."

수백 명의 국회의원 중 한 명으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을 서울시장이 되면 가능한 걸까?

이 부부가 원하는 것이 뭘까?

고모가 맡은 계열사의 완전한 독립?

아니면 정치계의 거물이 되어 순양을 압박하고 더 많은 것을 얻으려는 계획?

뭐든 좋다.

덩치 큰 순양그룹보다는 잘게 쪼개진 회사를 하나식 점령하는 게 더 쉬우니까 말이다.

"고모부 서울시장 되시면 우리 아버지께 공유지 큰 거 하나 뚝 떼주시죠."

"공유지? 땅 말이냐?"

"네."

"왜? 빌딩 하나 올리게?"

"아뇨. 큼지막한 극장 하나 짓게요."

나는 순진하게 웃으며 두 사람의 깜빡이는 눈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