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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막내아들>/056화 4장, Win-Win(3)/산경/필사/정 열

by 7sun 2023. 1. 12.

<재벌집 막내아들>/056화 4장, Win-Win(3)/산경/필사/정 열

 

처음 서재에 발을 디딜 때 쫄지 않겠다는 다짐은 소용 없었다. 오세현의 손끝이 떨리는 걸 보니 긴장이 극에 달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삼촌, 할아버지 뒤의 순양그룹을 보지 말고, 할아버지만 봐요. 그럼 편하실 겁니다."

오세현은 내 등을 툭 치고 엄지를 척- 하고 들었다.

"가자."

서재에 들어서자 할아버지는 안경을 벗으며 벌떡 일어섰다.

"반갑네. 자네가 오세현인가?"

"네, 회장님. 영광입니다."

오세현이 허리를 숙이자 할아버지는 손을 저었다.

"자자, 앉게. 편하게 앉아."

할아버지는 날카로운 눈으로 오세현의 모습을 샅샅이 훑었다.

"올해 몇인가?"

"쉰입니다."

"아직 한창때로구먼."

"도준이 덕분에 다시 젊어진 듯합니다."

어쭈? 아부까지? 오세현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싶었다.

"자네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우리 도준이 돈을 무려 백배나 키워줬다고? 대단한 능력이야. 허허."

순간 오세현이 의아한 눈빛을 나를 쏘아봤을 때 머리를 짧게 흔들었다.

"아, 그건... 운이 좋았습니다. 다행히 원금을 까먹지 않아서 늘 안도하고 있습니다."

"이 친구, 겸손은. 그 능력을 나를 위해 써 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네."

"과찬이십니다."

한동안 오세현을 치켜세운 할아버지는 서류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이게 건질 수 있는 돈이라고 들었네만."

"그렇습니다. 총 이천칠백억입니다. 부도유예협약 기간이 끝나면 법정관리 들어갈 게 뻔한데, 그 전에 빼돌려야 합니다. 만약 들킨다면 아진 송 회장은 물론이고 다수의 임원들 구속은 피하지 못합니다."

"쉽게 말해 돈세탁해달라는 건가?"

"송구스럽지만 그렇습니다."

"음..."

할아버지는 서류를 툭툭 치며 생각에 잠겼다.

"할아버지. 그 돈은 아진자동차 임원들 은퇴자금으로 챙겨줘야 할 것 같은데요?"

조심스레 말했지만, 할아버지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놈들 노후를 네가 왜 걱정해? 그놈들이 어떤 놈들인데? 자기들 노후 준비는 착실하게 해 놨을 게다."

할아버지는 오세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놈들 중 감방 가는 놈도 있나?"

"구색 맞추기로 서너 명은 보내야 하지 않겠냐는 송 회장의 의견입니다. 은행 채권단에게도 그 정도선에서 마무리하자는 제안을 던졌다고 합니다."

할아버지의 눈빛이 어둡다. 그동안 무수히 봐왔던 눈빛, 바로 탐욕이었다.

"오 대표, 이 돈을 미국 미라클에 모아두면 어떻겠나?"

"전부 말입니까?"

"왜? 안 돼?"

"안 될 건 없지만, 다시 빼낼 방법이..."

"이 돈을 전부 아진자동차에 재투자하면 되지 않겠나? 그리고 그 돈 먹으려는 놈들에게 월급이든, 보너스든, 특별 인센티브든 정당하게 지급하면 문제없을 것 같은데?"

오세현은 입을 떡 하니 벌렸다. 이천칠백억을 다 쓰려면 연봉이나 보너스를 얼마로 책정해야 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가장 합법적인 방법이긴 하다.

난 할아버지가 이 돈을 절대 주지 않을 방법을 찾아냈다고 확신했다. 조금 전 보여주었던 눈빛, 욕심이 한가득 묻어난 눈빛이 바로 본심이다.

"하지만 저들이 원하는 건 일시불입니다. 대부분 사직서 내고 떠나야 하니 한몫 달라는 거죠."

오세현은 아직 할아버지를 잘 모르니 저런 소리를 한다. 씨알도 안 먹힐 소리를.

할아버지는 역시 오세현을 좀 딱하다는 듯 바라보기 시작했다.

"자네는 투자자가 제격인가 봐. 경영은 어울리지 않겠군."

삼촌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지는 걸 보자 웃음이 터질 뻔했다.

"줘야 할 돈도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안 주려고 미루는 판에 주지 않아도 될 돈을 왜 미리 줘?"

이런 억지를 너무나 당연한 듯 말하자 오세현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게 눈에 보였다.

"이 돈 미리 다 챙겨주면? 그 순간부터 남남이야. 어쩌면 적에게 딱 붙어서 자네를 공격할지도 몰라. 그들 눈에는 자신들의 성이었던 아진자동차를 뺏어간 악당이 바로 자네거든."

"아..."

숫자만 상대하던 오세현은 갈대처럼 이리저리 휘청거리는 사람의 비겁한 이면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돈이 바로 채찍이고 당근이야. 쥐고 있게. 그리고 길들일 때 하나씩 빼서 줘. 선심 쓰듯이 말이야. 참, 자네도 내 돈 천억을 쥐고 이학재 실장을 오라 가라 했잖나? 그게 돈의 힘이야."

"아닙니다, 회장님. 오해십니다. 그건 법적으로 불가능해서..."

당황한 오세현이 급히 변명 같은 말을 쏟아냈을 때 할아버지는 웃으며 손을 저었다.

"오 대표, 자네를 탓하는 게 아냐. 예를 든거지. 잘 지켜보라고. 이 돈 이천칠백억이 아진자동차에 재투자됐다는 걸 알면 아진 놈들, 자네 발가락이라도 핥을걸?"

이 정도까지 노골적일 줄 몰랐을 것이다. 오세현은 충격이 큰 듯 할아버지의 말이 끝났음에도 입을 열지 못했다.

할아버지의 진면목을 더 보여주고 싶었다. 앞으로 자주 봐야 할 사이 아닌가?

"할아버지,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죠? 사실은 돈을 안주려고 생각하시잖아요."

내가 씩 웃으며 말하자 할아버지도 웃음을 터트렸다.

"예끼, 이놈아. 이 할애비를 돈 떼먹는 파렴치한으로 만드는 게냐? 허허."

그의 시선이 다시 오세현으로 향했다.

"자네는 어떤가? 그 돈 다 주고 싶은가? 아니면 생색만 내고 싶은가?"

"그럴 수만 있다면 당연히 안 줍니다."

"그렇지. 세상에 주지 않아도 될 돈을 주는 사람은 없어."

할아버지는 다시 내게 눈길을 던졌다.

"거봐라. 나만 나쁜 놈은 아닌 게야. 허허."

잠깐 동안 기분 좋은 웃음을 즐기던 할아버지는 서류를 내밀었다.

"자네는 이 방법이 최선이라고 송 회장을 설득하게. 아진이 꿍쳐둔 돈은 내가 처리할 테니까. 법정관리 들어가기 전에 깨끗하게 빨아서 미라클 금고에 넣어주지."

"감사합니다, 회장님."

"감사는 무슨, 내 새끼 위해서 하는 일인데."

나와 오세현이 일어나자 할아버지는 날 가리키며 머리를 저었다.

"넌 좀 더 있거라. 할 말이 있다."

"그럼 전 먼저 돌아가겠습니다."

오세현이 먼저 떠나자 할아버지는 웃음을 거뒀다.

"너, 휴학계 냈다면서?"

어차피 알게 될 일, 비밀로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너무 빠르다. 아침에 휴학계를 내고 곧장 이리로 왔는데.

"네, 오늘 제출했습니다."

"왜?"

"아시면서 그러세요? 큰일 시작했는데 학교 다닐 시간이..."

"이놈아, 누가 학교 꼬박꼬박 다니랬어? 적만 두고 있어도 돼. 휴학계는 찢어버리라고 했다."

"할아버지."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안다."

"네?"

"대학생 신분을 유지하면 친척들 눈길을 피하고 싶은 게 아니냐?"

"..."

훤히 꿰뚫어 보는 할아버지 앞에서 아무 말도 못 했다.

"어차피 부딪혀야 할 문제야. 뒤로 미룰 수 없어. 싸워야 할 때 싸워야 하고 손 잡을 때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때가 왔을 때 네가 학생이라는 것은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 것이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칼자루를 쥔 분은 할아버지 아니세요?"

다소 노골적인 말이었지만 더는 미루지도 덮어두지도 못할 문제다. 할아버지가 먼저 시작한 말이다.

"이놈아, 순양그룹이 동네 슈퍼냐? 내 칼이 미치지 못하는 곳도 많다. 중요한 핵심 계열사 사장 몇 놈이 나서서 네 큰아버지 손을 들어주면 순양그룹은 그날로 둘로 쪼개진다."

그럴 가능성이 없다는 건 알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그룹 승계가 시작될 때 순양의 임원들은 대학생 딱지를 달고 있는 나는 어린애로 볼 것이다. 승계를 시작한다는 것은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뜻이고 권력은 순식간에 큰아버지에게 몰릴 것이다.

"알겠습니다. 할아버지 뜻에 따르겠습니다."

조용히 머리를 숙인 다음 서재를 빠져나올 때 참으려 해도 저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할아버지의 마음은 이미 내게 기울었다는 걸 또 한 번 확인했기 때문이다.

* * *

"여의도로 가요."

나를 기다리던 김 대리는 운전대를 잡고 속도를 올렸다. 룸미러로 내 눈치를 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저기,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괜찮습니까?"

"네, 말씀하세요."

"제 착각일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누군가 꼬리를 붙인 것 같습니다."

모토로라 스타택을 만지작거리던 내 손이 굳어버렸다.

"언제부터요?"

"글쎄요. 언제부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단지 제가 눈치챈 건 며칠 되지 않았습니다."

"자세히 말씀해보세요."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만 차는 항상 따라붙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동선만 계속 파악하는 것 같은데..."

김 대리는 분명 영빈관에서 근무했다고 말했다. 누군가의 미행을 눈치챌 만한 교육을 받았을 리가 없다.

어떻게 알았을까?

룸미러로 나를 보던 김 대리는 미심쩍어하는 내 눈과 마주치자 당황한 듯 입을 열었다.

"아, 신 팀장님께서 주의 주셨습니다. 요즘 이상하리만치 미행이 많다고요."

"신 팀장?"

"아, 우리 전략1팀 팀장님입니다."

"미행 말입니다. 기자 아닐까요?"

가십거리만 캐고 다니는 주간지 기자들에게 재벌 3세는 먹잇감이라 미행은 흔한 일이다. 연예인과 함께 호텔로 들어가는 순간을 포착한 사진은 수백, 수천만 원짜리 수표나 다름없다.

"아침부터 따라다니는 기자는 없습니다."

설마? 큰아버지가 붙인 놈들인가?

불안한 마음이 얼굴에 드러났나 보다. 김 대리가 조심스레 말했다.

"신 팀장께서 누구 짓인지 확인 중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붙은 것 같은데 바쁘지 않으시면 확인 좀 해도 되겠습니까?"

"그래요. 간만에 드라이브 좀 하죠."

"안전벨트 매십시오. 좀 밟겠습니다."

자동차는 강변북로를 향해 달렸다.

* * *

"삼남 진상기와 사남 진윤기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진상기는 큰형인 진영기 옆에 딱 붙어서 꼬리만 흔드니까요. 진윤기는 영화계에서 입지를 굳혔습니다. 그룹은 아예 관심 밖입니다."

"그럼 둘째인 진동기가 문제라는 건가?"

"네, 실적만 놓고 본다면 진동기가 훨씬 좋습니다. 중화학 분야를 국내 탑으로 끌어올린 장본인이니까요. 그리고 계열사 사장과 임원들의 평판도 좋고요."

"후계 순위에서는 밀리지만 신하들의 평판을 등에 업었다.?"

"그런 셈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화학, 중공업 부문은 진동기가 맡을 가능성이 큽니다."

프로젝터가 돌아가는 어두운 회의실에는 순양그룹 가계도에 각자의 특징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외동딸인 진서윤은 어때?"

"욕심은 많으나 여자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게 중론입니다. 백화점, 골프장, 호텔 그리고 문화재단을 차지할 것 같습니다."

"흥! 누구 마음대로."

"소영아! 잠자코 들어."

한성일보 홍 회장이 콧방귀를 끼는 손녀에게 눈을 흘기자 홍소영은 입을 닫았다.

"계속해."

"네, 그런데 조사를 시작하고 나서 생각지도 못한 복병을 찾아냈습니다. 바로 손자인 진도준입니다."

"진도준? 막내?"

홍씨 일가 사람들은 의외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네. 사남 진윤기의 차남이죠."

"그 애가 왜? 서울대 법대 다니는 책벌레 아냐?"

"한 학기 동안 등교한 날은 손에 꼽습니다."

"그럼?"

"매일 여의도로 출근하다시피 합니다. 진 회장님 댁도 자주 들르고요."

"여의도?"

"네, 아무래도 외국계 투자사인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조사한 바로는 개인 재산이 꽤 된다고 합니다."

"얼마나?"

"못해도 수백억, 많게는 천억 원에 육박하지 않을까 합니다."

천억이라는 말에 홍 씨 사람들은 입을 떡 벌렸다.

대학 신입생이 천억이라니?